프린스의 방에서의 1과 128분의 12초
Feb 2019
 
Installation
@전시공간 | all time space
 
 
존재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기이고, 또 하나는 위성이다.
 
물론, 우리는 배워서 안다. 우리들은 공기를 숨 쉬고 있다. 공기는 질소와 산소로 되어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기체들, 그리고 부유 먼지와 바이러스 등이 뒤섞인 혼합기체이다.
특별히, 지구라는 별을 감싸고 있으면서, 우리들-허파를 가진 포유동물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산소를 얻기 위해,
그것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살아가는 그 물질, 그것을 우리들의 언어체계에서는 ‘공기’라고 지칭해 부르고 있다.
공기는 어쩌면 우리들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정의하는 요소로 포함되어야만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지나치게 밀접하고,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어떤 것이다.
만약 공기가 없다면, 우리들의 언어적 사고는 질식되어 멈춰 설 것이고, 우리들의 발화는 매질을 잃어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공기 속에서 태어나서, 공기 속에서 죽는다. 공기 속에서 만들어낸 공기의 ‘공기’라는 떨림이 공기를 지칭한다고 하면, 사실, 그것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의아해진다.
공기는 너무 가깝고, 너무 작고, 혹은 그것 자체가 우리 존재의 기반이어서 그것이 존재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번에는 위성의 경우인데, 하늘에 사람들이 만든 위성이 떠 있다고 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너무 멀고, 너무 조용하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우리들은, 하늘의 태양처럼, 전파의 빛을 뿌려주는 위성으로부터, 우리의 스마트폰의 위치, 노트북의 위치. 자동차의 위치를 공급받는다.
태양은 우리들의 시각의 어머니와도 같아서, 그것이 뿜어내는 빛의 복사 에너지를 눈으로 쫓아가 보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지만,
눈으로 쫓을 수 있는 궤적을 갖지 않는 인공위성의 별빛-전파-를 감각하기란, 가능한 일의 부류에 쉽게 들어오진 않을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것, 위성은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다고들’ 한다.
그것은 거기에 언제나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로 있는지 혹은 없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응답을 염원한다.
 
내일도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기를 염원하듯이.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의 위치정보가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지금 내쉰 숨이, 바로 다음 순간의 들숨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염원하듯이.
오늘 점심에 남긴 카톡이 그 사람의 카톡에 전달되기를 염원하듯이.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태양은 지구가 도니까, 떠오른다.
위성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그렇다.
공기는 우리 허파에서 혈액이 CO2와 O2를 교환할 수 있게 해주지.
카톡은 카톡이니까, 잘된다.
사실은, 그러니까, 그다지 ‘염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응답을 염원한다.
 
세계 속에 가득한 셀 수 없는 존재들은.